출사표, 그 영화를 둘러싼 세계에게

모처럼 긴글을 써볼까 한다.
강수확률 90%, 촬영이 연기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쓸 마음이 생겼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을 것이다.
몇가지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는다.


영화에 있어, 나는 '현실의 것'이 아닌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영화적 취향을 가졌다.
대중 영화에 있어, 나는 대체로 두줄짜리 시놉시스를 읽고 무엇을 관람할지 선택한다.
나는 그런 선택의 기준을 가졌다.
대중 영화의 홍보에 있어, 나는 영화 외적인 것인 것을 영화 안쪽으로 관개시켜 이슈화하는 영화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경험적 자각을 가졌다.


이런 것들이, 내가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데도 밝히고 있는, 그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다.
여하간에 영화를 보지 않은 이상 그 영화의 영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말 하지 않겠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어느 날 그 영화가 나타났다. 곧 어떤 종류의 사단이 일어났다. 이 사단이란 간략히 말해 "어떤 가치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집단 사이의, 그 가치 바깥에서의 싸움"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빠, -까"라는 식의 접미어가 붙는 모든 사회적 현상의 대목마다 이러한 반목이 있어왔다.


이 사단과 직접 연계되어 있는 집단의 내부자임에도 이 반목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익숙히 겪어왔던 그 사단들이 마무리지어졌던 양상으로, 이 사단 또한 어떠한 부침 끝에 '정의에 가까운' 결과를 남기고 봉합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나의 태도다. 나는, 붉은 광풍을 뚫고서 효순이와 미선이가 하나의 흐름을 이끌어 내던 대목을, 황우석이 마침내 검찰에 서던 대목을, 그것들을 정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불의보다는 정의에 가까운 어떤 지점으로의 일보라고 생각해 왔다. 숨 쉬듯이 일어나는 반목과 쟁의를 견뎌가며, 어쨌건 역사는 정의에 가까운 쪽으로 전진해가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영화를 만든 이가 자기가 내뱉은 어떤 명백한 거짓말에 대해, '바쁘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라는 식으로 애두른 후, 영화를 완성하기 까지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 술회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서, 나는 어떤 징후를 읽었다. 이 사단의 어떤 '정의에 가까운 봉합'에 대한 징후였다. 그가 바쁜 와중에 신경쓰지 못한 것들, 사소하다는 이유로 결코 소멸되지 아니할 그 작은 진실들이 언젠가 이 헐거운 광기의 진원으로 일괄 진격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그러나 지금 이 광기는 맵다. 사소하지만 반드시 규명되어야할 진실에 대한 각성조차 매운 바람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쇼비니즘, 감성적 영웅주의, 그것을 무어라 이름하든 이 바람을 막아야 한다.


'헐리우드와 맞장 뜨신 위대한 감독님 왕따시키면서 조폭 코미디 만들어 관객들 등쳐먹던 니들 다 죽어'라는 식의 객기는 웃고 넘기더라도, '그래 당신들이 그 영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조목조목 파고들어서 "훌륭하지 않은 영화"라고 하는 거, 그 말들, 나 다 알아듣는다. 근데 나는 단지 내가 낸 7000원 만큼 즐기고 싶을 뿐이야. 영화가 다, 훌륭해야 해? 그 감독, 열심히 했잖아. 니들 못하고 있는 거, 세상에서 헐리우드만 할 줄 알았던 거, 그 감독 했잖아. 나 솔직히 좀 자랑스러워. 영화 좀 유치해도 전투 씬 진짜 볼만했고, 마지막에 아리랑 흐를 땐 정말 울컥했어. 피가 댕겼어. 이거 잘못된 거야?'라는 합리적인 반문 끝에 '그러니까 니들 다 죽어'의 증오로 맺는 패착들이다. 이 패착들이 발본색원주의의 불을 지핀다.


잘못되지 않았다.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이 감동했다는 이유로, 당신의 피가 댕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오지 않았던 이들'과 '그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한 무더기로 묶어서 마녀사냥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묻지 않았음으로 굳이 설명할 필요없는 나의 어떠한 기준에 준하여 그 영화를 보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당신이 두번째 이송희일을 죽이고 세번째 허지웅을 고문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영화를 보고 당신의 발본색원과 맞써 싸우겠다. 이를 악물고 싸우겠다.

by 문뒤의비밀 | 2007/08/05 18:36 | 외부로설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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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epial at 2007/08/05 20:44
잘 보고 갑니다. 이러다 또 축구하면 또 다들 축구보러 갈겁니다....ㅠ.ㅠ
Commented by 코로나 at 2007/08/09 09:04
님의 글이 그나마 답답하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영화 잘 되시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문뒤의비밀 at 2007/08/11 21:44
sepial 님 /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질 겁니다.


코로나 님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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